소년기와 성장기
해석 정해영 선생은 1915년 9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 영일 정씨 구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중 특히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사랑방을 출입하면서 선생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와 글을 배우고, 민족혼을 살리는 길만이 곧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깨우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동쪽바다의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울산. 지금은 거대한 공업단지가 자리잡아 한국경제발전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도시지만, 경제개발이 이뤄지기 전만 해도 신라 임금 헌강왕 앞에 동해왕이 처용(處容)을 바쳤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한적하고 인심 좋은 고장이었다. 그 울산에서도 하장면이라면 정계·관계·학계·경제계 등 각 분야에 걸쳐 국가의 동량을 많이 배출해 낸 곳으로 유명하다.
해석(海石) 정해영(鄭海永) 선생은 이 하상면 동녘을 흐르는 동천(東川) 냇가 진장(珍또)마을에서 1915년 9월 포은 정몽주(團隱 鄭豪周) 선생의 후손, 영일 정씨 구용(久鎔)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구용 씨는 하상면 소재지인 병영에서 미곡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매우 근겸한 분이어서 덕망가로 군내에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자수성가로 삼백석지기의 가산을 이룩한, 후일 경제인 정해영의 자질을 키워준 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복하고 덕망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해영은 학성보통학교(지금의 병영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동천의 모래사장, 학성공원, 병영성 뚝을 뛰어놀며 꿈과 희망에 부푼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 중 특히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울산이 배출한 근대사의 위대한 인물 외솔 최현배 선생의 사랑방을 출입하면서 선생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와 글을 배우고, 민족혼을 살리는 길만이 곧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우쳤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우리글 사랑·나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의 의지를 배웠으리라.
열네살 되던 해 봄, 해영소년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당시 전국적으로 경쟁률이 높던 부산 제 2공립상업학교(지금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무난히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우리의 인재들은 정치계나 관계에의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은 법률가나 경제인이 되기를 소망했고, 해영소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금련산 기슭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며 가진 그의 꿈은 유능한 경제인이 되어 한국 제일의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열아흡살에 상업학교를 나온 해영소년은 ‘너는 장남이니까 집안일을 돕고 내 사업을 계승하라’ 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대학진학을 단념하고 울산으로 돌아가 가업을 도우면서 유능한 경영인이 될 자질을 키워갔다. 꼭 1년간 부친 밑에서 미곡상과 정미소의 경영과 사업의 요체를 익힌 그는 1935년 스물한살 되던 해 부산 범일동에 태공정미소를 차렸다. 이것이 그의 사업계 진출의 첫출발이었고, 그가 부산진과 인연을 맺은 시초였으며 이후 줄곧 범일동과 서면 일대에서 살며 제2의 고향, 그리고 정치적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경제계로 진출하다
바로 이 연탄의 대명사처럼 불리운 19공탄 처음 만들어 낸 곳이 바로 대동연탄인 것이다. 6·25동란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되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자 부족한 장작 대신 시민생활의 주연료가 되었으며 수복 이후 서울에 그대로 전파되어 수천 년 내려오던 장작난방 방식을 몰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최초의 사업 태공정미소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식량통제가 강화되어 사업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근 8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20대의 청년실업가 정해영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적 자질과 젊고 패기있는 과단성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단 8년 만에 아버지가 일생 걸려 이룩한 재산을 몇 갑절로 키워내는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일제하 당시의 부(富)의 척도이던 미곡산업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첨단산업인 석탄산업에 투신하고, 몇몇 전문가를 빼고는 이름조차 생소한 플라스틱의 일종인 ‘배크라이트’ 를 개발하기도 하는 등 정해영 씨의 기업가적 자질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은 일본인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일례로 조선인이 실업가로서 크게 성공하는 것을 시기한 일본인 실업가들이 모함하여 경찰에 구속되기까지 하였으나, 청년 실업가의 장래성을 인정하여 훈방한 일도 있었다.
해석 정해영 씨는스무살 되던해 당시 부산진 최고유지의 한사람이었던 송태승(宋泰昇) 씨의 따님 송옥자(宋玉子) 여사와 결혼했다. 송옥자 여사는 그 전 해 미나또고등여학교(지금의 경남여고)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정해영 씨의 빙장이 된 송태승 씨는 전라도 김제군수를 지내며 청렴한 행정가로 이름을 떨쳤고 당시 부산에서 송 군수라면 모르는사람이 없을 정도로 덕망가였다. 덕망 높은 청렴한 행정가와 전도가 양양한 20대 실업인의 만남 이것만으로도 인근 노인네들의 얘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한데, 이 장인과 사위 즉 옹서지간의 사이가 유별나게 좋아서 줄곧 부산진의 화젯거리가 되어왔다고 한다. 또한 정해영 씨의 사업경영에도 빙장의 후견이 커다란 힘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선정과 덕치로 만인상(萬人賞)을 받으셨던 청백리 송태승 선생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김제군청 숙직실에서 숙직하던 직원이 아침마다 사망한 사건이 연 5일 연속 일어났다. 그러자 6일째 송태승 군수가 직접 숙직하기로 했다. 그날밤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불빛이 비추더니 산발을 한 젊은 여인이 고개숙여 “군수님 저의 딱한 소원을 들어 주십시요. 저는 아랫마을 아무개 딸로서 저의 무덤 옆의 대나무 뿌리가 저를 찔러 아파 견딜수가 없으니 이장을 부탁합니다.”라고 간청하니 군수님이 그러마하고 대답하자 소복 여인이 사라졌다. 그 다음날 이 사실을 확인하고 이장하여 준 이후로는 조용하였고 귀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숙직실에서 사망한 5명의 직원은모두 귀신을 보자마자 기절하여 사망한 것이었다. 송태승 선생께선 8 ·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22 일(음)에 화려한 일생의 막을 내리셨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정해영 씨는 양곡상에서 연탄업으로 업종을 일대전환하여 사업가로서의 두번째 새출발을 하게 된다. 1943년 범일통 매축지에 설립된 대동연탄(大東練炭)은 우리나라 연료계에 역사적인 전기를 이룩한, 그리고 청년실업가 정해영 씨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안목의 진수를 보여준 사업이었다. 80년대까지 우리 생활에서 쌀과 물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연탄이었다. 바로 이 연탄의 대명사처럼 불리운 19공탄을 처음 만들어 낸 곳이 바로 대동연탄인 것이다. 그때까지 구멍탄은 일본사람이 화로용으로 쓰던 직경 10cm 정도의 9공탄뿐이었는데 정해영 씨는 이것을 크게 하면 취사난방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직경 18cm의 19공탄을 처음으로 제작하여 시판하였던 것이다. 후에 25공탄으로 발전된 19공탄은 그로부터 7년 후 6·25동란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피난민으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자 부족한 장작 대신 시민생활의 주연료가 되었으며 수복 이후 서울에 그대로 전파되어 수천 년 내려오던 장작난방 방식을 몰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19공탄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의 산야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할 때 정해영 씨가 19공탄을 착안, 보급한 공로는 어떠한 훈장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것이다. 사업적으로 대동연탄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전국적인 공장조직을 가지고 서울, 대전, 부산 3대도시의 연탄업계를 석권하게 되었으며, 정해영 씨 개인에게는 영예스러운 ‘석탄왕’ 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 연탄업계를 제패하는 도약대가 된 대통연탄은 후에 ‘대양석탄’ 으로 개칭되고 다시 ‘대양산업’으로 상호를 빠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최고 납세자가 되다
8·15해방 이후 똑똑하다는 사람은 모두 정치계에 모여들고 경제계는 가히 공백상태에 있었던 혼란 속에서, 정해영 씨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사업에만 전심하면서 착실하게 그 경제기반을 굳히고 또 확장해 갔다. 이 무렵에 그가 부산에 설립한 석탄상 대양상회(大洋商會)는 급격히 확장되어 서울의 청량리, 을지로, 용산, 마포 그리고 대전시 등지에서 각각 독립된 연쇄조직의 업체를 형성했으며, 창업 3년째인 47년에는 이미 전국 석탄 취급량의 3분의 1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어느날 부산세무서장이 식사대접을 하겠다고하여 갔더니, “각처에서 들어온 자료를 근거로 과세액을 내보니까 정 사장 소득세가 경남·부산지역에서 최고액입니다. 너무나 엄청나서 당사자에게 한번 사전양해나 구해 보려고 이렇게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라고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정해영 씨는 즉석에서 “무슨 말씀입니까? 과세액이 그렇게 나왔다면 당연히 내야지요. 실은 내가 스무살에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인들 틈에서 최고의 납세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최고 납세자가 최고로 돈 많이 번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에야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자축하는 뜻에서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었다. 정해영 씨에게는 이 무렵부터 ‘석탄왕’ 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약관 32세였다.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
부자가 되겠다는 소년시절의 꿈을 이룬 정해영 씨는 어떻게 하면 가장 보람있게 돈을 쓸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릴적 외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인재를 키워야 나라가 산다’ 는 가르침을 받은 정해영 씨가 우선 손을 댄 것은 ‘동천장학회’ 라는 장학기금이었다. 동천은 물론 그의 출생지 진장마을 옆을 흐르던 시내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러나 동천장학회가 발족한 직후 6·25동란의 발발로 본격적인 사업은 휴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성북동에 400여 평 대지를 마련, 50 여 명을 수용할 기숙사 시설을 갖추어 울산·부산 둥지에서 진학해 온 성적이 우수하면서도 가계가 넉넉치 못한 학생들을 선발하였다. 가난한 학생에게도 서울유학의 길이 열렸디는 소문이 퍼지자, 학생들은 향학열에 불타올랐다. 동천학사(東川學舍)라고 이름하는 이 장학시설은 25년 동안 500여 명의 학생들에게 기숙사와 장학금을 제공했으며, 이곳을 거쳐 나온 수백 명의 준재들이 장관·판검사·국회의원·기업인·학자 등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보국정신으로 정치에 투신하다
동족상잔의 6·25동란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에서 끝나고 38선 대신 휴전선이라는 분단선이 국토 한 허리에 다시 그어졌다. 통일이라는민족적 비원이 이루어질 날은 이제 기약조차 할 수 없게 되고, 전후의 정치적 경제적 흔란 속에 부정과 부패만 심화되어 갔다. ‘이 혼란 속에서 질서와 정의를 회복하고 경제적 부흥을 이룩하여 우리 자신의 힘으로 통일을 이룩할방도는 없는가?’ 정해영 씨는 6·25동란을 계기로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정치인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마음껏 내 능력을 발휘해 보는 것도 값 있고 사나이다운 일이 아닌가? 정치인이 되자! 될 바에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훌륭한 정치인이 되자’ 패기충만한 청년 정해영 씨가 이렇게 뭇을 굳히고 있을 때, 향리 울산유지 수십 명이 찾아와서 입후보만 하면 당선은 틀림없다며 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울산 을구에서 출마할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5·30총선을 한 달 보름 앞두고 출마를 결심한 백면의 무명정객은 당시 자유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이며 당당한 기성 정치인이었던 변호사 안준기 씨를 누르고 3대 민의원으로서 당당히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이 시작되었으니 1954년 39세의 일이었다.
3대국회에 진출하면서 정해영 의원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주변을 정려하는 일이었다. 정열을 다해 경영해온사업체들을 정리해서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자기는 일체의 사업에서 손을 뗐다. 국사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영리업체에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10대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정해영 씨는 7선이라는 놀라운기록을세우게 되며, 국회에서 그의 일관된 신조는 신념에 사는 성실한 정치인이 되어 선거구민이 맡겨준 수임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3대국회 초에 자유당에 입당한 정해영 의원은 계수에 밝은 정치인, 재정경제의 제 1 인자로서 삽시간에 당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경제문제에 관한 정책수립이나 대정부 질의에서 그는 언제나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5·16 후 군정 당시의 일이지만 정해영 의원은 한국 경제계의 최고 거두인 이병철 씨가 동아일보를 통해 발표한 ‘우리가 잘사는 길’ 이라는 경제논문을 반박하고 나서 한동안 지상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이병철 씨의 주장은 국가발전을 하자면 대재벌부터 키워야 한다는 것이고 정해영 씨의 주장은 인구의 절대다수인 저소득층을 바탕으로 경제를 일으켜 그것이 집대성하여 대재벌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내세워 설왕설래 했던 것인데, 이 지상 논쟁은 우리나라 경제의 기본방향을 점치는 것으로서 당시 식자층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정계를 뒤흔든 소맥분 사건
나는 국회의원의 직분을 맡고 나온 이후 언제나 국가재정을 알뜰하게 써서 그 돈값어치 이상의 효율을 내도록 하는 것만이 국가와 민족을부흥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따라서 국가재정을 협잡·착복하는 자는 그의 권세가 아무리 당당한들 이를 규탄하고 제거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책무라고 확신합니다.
순풍에 돛단 듯하던 정해영 의원의 정치생활은 3대 국회의원 임기를 1년 남긴 1957년 4월 정계에 폭풍을 불러일으킨 세칭 ‘소맥분 은폐보조 폭로사건’을 계기로 하여 무서운 역풍 속에 휘말리게 된다. 정해영 의원은 자유당 정책위원회에서 농림장관에게 매우 홍분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물가가 이렇게 급등하는 가장 큰 원인은 양곡가의 등귀 때문이다. 제분협회가 톤당 6만 4,000환이면 돈벌이가 되고도 남는 도입소맥을 9만 8,000환씩에 팔아먹고 500 대 1로 사들인 소맥을 밀가루로 만들어 1,660대 1로 팔아먹고 있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정부가 묵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400만 절량농가와 부지기수의 도시 세궁민이 뱃속에서 꼬루룩소리를 내고 있는 판에 이런 날도둑질을 묵인하고 있으니 몰랐다면 장관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알고도 내버려뒀다면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정 의원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도입원맥을 그러한 중간업자의 폭리의 대상으로 맡겨두지 말고 절량농가나 도시 세궁민에게 정부가 직접 배급해 주라는 것이었으며, 전국 최고의 경영인으로서 활동해 온 그가 아니었으면 국민도 모르게 넘어갈 뻔한 부패의 고리를 밝혀낸 것이다. 결국 정 의원의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정부는 제분협회가 보관중이던 32만석의 보리를 직접 세궁민에게 나눠주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정 의원 때문에 폭리를 못 취하게 된 제분업자들은 음양으로 정 의원을 중상모략했고 그 때문에 막대한 정치자금 염출원을 잃게 된 자유당 고위간부들은 은연 중에 정 의원을 제거·축출할 것을 획책하고, 마침내 정해영 의원은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이에 대해 정해영 의원은 “나는 국회의원의 직분을 맡고 나온 이후 언제나 국가재정을 알뜰하게 써서 그 돈값어치 이상의 효율을 내도록 하는 것만이 국가와 민족을 부흥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따라서 국가재정을 협잡·착복하는 자는 그의 권세가 아무리 당당한들 이를 규탄하고 제거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책무라고 확신합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전국 경향각지에서 보내온 수백 통의 격려문은 나의 이 신념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이 가려질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자유당을 박차고나가 무소속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걷게 될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이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갖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권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이땅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친다.
인구에 회자한 ‘사필귀정은 사필귀정이다’
자유당 정권은 갖은 수법을 다 동원하여 그가 4대국회에 진출하는 길을 끝내 봉쇄하였다. 1958년 5월 2 일 실시된 울산 을구의 4대국회의원 선거는 건국 이래 전무후무한 부정선거였다. 전국 깡패들이 동원되어 권총을 난사하고, 정해영 후보 운동원들을 구타하였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정 의원의 운동원들을 감시하기 위해 전국 경찰력이 동원되었다. 깡패들에게 구타당한 운동원이 경찰에 신고하면 오히려 신고한 사람을 잡아가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투표 당일 깡패들이 선거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투표용지를 몽땅 자유당후보에게 기표해서 집어넣은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투표결과는 정해영 씨가 훨씬 우세했다. 그래서 다시 피아노표, 바꿔치기, 샌드위치표등 부정개표 방법이 있는 대로 다 동원됐다. 투표총수 약 4만 표 중 무효표로 만들어 버린 것이 7,000표를 넘었고, 후일 대법원에서 재개표한 결과 되살아난 정해영 후보의 표가 5,000표를 넘었으며, 민주당 추천 선거위원의 인감을 위조해서 만든 위조투표용지 수백 장이 발견되었을 정도니 개표부정이 얼마나 극성스러웠던지를 알 수 있겠다.
“누가 당선되고 안 되고는 둘째 문제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정선거는 뿌리뽑아야 하며, 도둑맞은 국민주권은 되찾아야 할 것 아닌가?’ 며 정 후보는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대법원에서 선거무효판결을 받아냈다.
정해영 후보의 승리를 계기로 언론에서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고사성어가 한동안 유행하기도했다.
다시 치뤄진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정해영 씨는 패하였지만, 이 선거는 후일 정해영 씨가 신민당 원내총무로서 선거법 개정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자유당 독재정권은 곧 4·19로 인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4·19가 일어나 부산에서는 시장관사를 비롯하여 자유당소속 국회의원의 저택들이 흥분한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서면로타리의 부산진 경찰서도 군중의 투석으로 반파되었다. 그러나 그 로타리 한녘에 있던 정해영 씨의 자택은 도리어 군중들의 보호를 받아 아무 탈이 없었다. 과거에 만일 정해영 씨가 일시적 안일을 위하여 자유당 부패세력과 타협하든가 굴복하였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로써 사람은 언제나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철리가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민주당이라면 막대기를 꽂아놔도 당선됐다는 1960년 7.29 총선거에서 정해영 씨는 무소속으로 울산 을구에 출마하여 압도적 다수표로 5 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때 정 의원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선거연설도 변변히 하지를 못했는데 울산의 유권자들은 빼 앗겼던 주권을 도로 찾는 축제와 같은 기분으로 그에게 몰표를 던졌던 것이다.
정 의원은 당시 서로 입당을 권유하던 민주당 신·구 어느 파에 들어갈 것인가를 선거구의 주요멤버들과 논의했다. 모든 인사들은 정 의원이 신파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정 의원의 생각은 달랐다, 민주당 신파정권에 장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파에서는 정 의원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상공부장관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 의원이 보기에 장면 정권은 너무나 무능했고 두서도 질서도 없었다. 부정부패의 징후도 엿보였다. 이런 정권에 붙어 장관 감투 하나 얻어쓰고 희희낙낙하느니 보다 새로히 발족할 구파중심의 야당에 들어가 자유로운 입장에서 국정쇄신에 힘쓰는 것이 훨씬 더 보람 있는 일라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눈 앞의 편안함보다 먼 안목으로 시국을 보자’ 면서 정 의원은 선거구 유지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상경 즉시 신당발족을 추진 중인 구파에 들어가 창당준비위원회의 정책위원회 부의장이 되어 신당의 정책을 기초하고 원내 투쟁에서 정책적 뒷받침을 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민주화 투쟁의 길
결국 군정종식이란 역사적 명제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정열적인 분투는 야당 내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립케 했으며, 급기야 제일 야당의 최고 스태프의 한사람으로 올라서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구파의 신당이 신민당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지 채 반 년이 못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장면 정권은 쓰러지고 5대국회도 해산되어 암흑과 공포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정해영 의원에게도 군사정권의 박해가 가해져 왔다. 정 의원이 5대국회에서 ‘남북통일은 이쪽에서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남북간의 서신교류, 신문기자의 상호 시찰 같은 것을 이 편에서 제안해도 좋지 않은가’ 하고 발언한 것을 문제삼아 중앙정보부에서 오너라 가거라 괴롭혔다. 그러는 한편 도처에서 유혹의 손이 뻗쳐왔다. 동향의 후배인 이후락 씨는 일부러 그를 찾아와 ‘민주공화당에 들어와 같이 일하든가 정 의원이 사업수완이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면 크게 돕겠다’ 고 했다. 그러나 정해영 씨는 ‘군사정권이란 원래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기형형태인데 그래도 민주주의를 이땅에 확립하겠다고 정계에 투신한 내가 어떻게 여기 가담하겠으며 사업도 좋지만 나도 먹고살 만큼은 가지고 있으니 정치권력에 빌붙어 돈벌이를 할 생각은 없다’ 면서 이 권유를 일축했다. 그리고는 옛 동지를 찾아 민정당 대열에 결연히 뛰어들고 만 것이다. 1963년은 정해영 씨의 정치행로상 가장 분망하고 보람 있는 해가 되었다.
그는 그 끈질긴 정력과 수완을 있는 대로 야당재건에 퍼부었고 막대한 사재를 아낌 없이 투입했다. 결국 군정종식이란 역사적 명제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정열적인 분투는 야당 내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립케 했으며, 급기야 제일 야당의 최고 스태프의 한사람으로 올라서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해에 그의 나이 만 48세,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꼭 10년만에 드디어 한 정당의 최고간부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서울 혜화동 26번지의 그의 자택 사랑방이 야당재건의 산실이자 군정타도 운동의 센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4파연합 신당을 막후에서 지휘하던 유진산 씨를 중심으로한 구신민당의 주축 간부들은 날마다 이 사랑방에 모여 민정당(民政黨) 창당을 구상했고 이 사랑방에서 전국에 지령하였던 것이다. 정해영 의원은 63년 10·15 일에 치러진 6대 대통령선거와 11월 26 일의 국회의원선거에서 중앙선거대책본부 사무장으로 전국 선거를 총지휘했다. 이때 군사정권에 의한 선거법개정으로 정해영 씨의 선거구였던 울산 을구는 울산 갑구와 합쳐 한 선거구가 돼버렸기 때문에 정해영 씨는 제 2의 고향인 부산진 을구를 맡아 선거기반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던 차 대통령후보가 된 윤보선 씨의 전보를 받고 급거 상경했더니 윤보선 씨가 직접 혜화동으로 정해영 씨를 찾아와 중앙선거본부의 총책임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했던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 비록 윤보선 후보가 석패했으나 정해영 선거사무장의 활약으로 득표수 차이는 16만 표에 불과했으며 막강한 자금과 조직을 가진 박정희 후보는 사실상 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해영 총무는 만악의 근원이 부정선거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선거법 개정작업에 흔신의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여당을 설득도 하고 위협도하면서 선거법을고쳐, 1971년 실시된 8대 총선에서 야당이 사상 최대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1963년 전국구 2번으로 6대 국회 에 진출한 정해 영 씨는 이제 당당한 3선의원이 됐으며 당에서는 중앙당조직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윤보선체제의 총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공화당정권이 한일협정을 서두르고, 이에 대한 반대투쟁 과정에서 정해영 의원은 당시에는 전국구의원이 탈당을 하면 자동적으로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적을 미련 없이 버림으로써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였다. 이때 의원직을 버린 사람은 정 의원을 비롯하여 윤보선, 정일형 등 8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올곧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정신과 그의 탁월한 조직력이 인정되어 67년 실시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해영 씨는 또 중앙선거대책본부의 선거담당 차장으로 실질적인 전국 총지휘관 노릇을 또 한번 맡아 했다.
정책으로 승부하는 야당 만들기
1967년 4선의원이 되어 7대 국회에 들어간 정해영 의원은 당 3 역 중 하나인 정책심의회의 의장의 중책을 맡아 새출발하는 통합야당 신민당의 정강정책을 기초했다. 68년 5월 전당대회에서 이 정책안은 채택되어 신민당의 나아갈 지침구실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이 정책안에서 정해영 의원은 63년도 이후에 내세웠던 그의 정견과 그동안 신문지상 등을 통하여 여러 차례 발표된 그의 주장을 총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신민당의 정책적 바탕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부단히 외침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고, 계속하여 정치적 악순환을 겪어왔기 때문에 국민경제 상태가 형편없이 되었다. 그동안 미국의 원조도 적지 않게 들여왔지만 위정자의 무능, 부정부패 때문에 오히려 경제질서는 파괴되고 소비풍조가 조장되었을 뿐이다. 정해영 의원은 이같은 국민대중의 민생고 문제를 정치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삼아 여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공화당정부는 경제건설을 내세워 왔지만 민주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정권은 절대 부패하게 마련이었으며, 부정부패는 스스로 경제건설을 저해하고 국민경제의 암적 존재가 되고 있었다.
정해영 의원이 기초한 신민당의 정강정책은 공화당의 본질과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국시로 하고 신봉하며, 이에 위배되는 어떠한 체제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바탕 위에 국가안보를 이룩하고 부정부패 없는 협조적 사회를 건설하며, 국민대중을 위한 국민경제를 건설한다. 특히 경제건설에 있어선 어느 한 부문이 다른 부문의 성장 명분을 위해서 희생됨이 없는 균형잡힌 정책을 취해야 하며 중공업과 중소기업, 농업 등 우리나라의 3대 근간산업을 상호 연관성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선거법 개정
1969년 3선개헌 문제로 어수선한 시기에 정해영 의원은 야전사령관격인 신민당 원내총무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난국을 따하고 효과적인 대여투쟁을 하기 위해 ‘협상의 명수’ 라고 알려진 그의 수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해영 총무는 그 자신이 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직접 경험했듯이, 만악(萬惡)의 근원이 부정선거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선거법 개정작업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선거법개정에 대한 선생의 집념은 참으로 강인했다. 심지어 신민당 내에서까지 정 총무는 선거법개정에 아주 미쳐버린 것이 아니냐고 빈정대는 이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여당을 설득도 하고 위협도 하면서 선거법을 고쳐, 1971년 실시된 8대 총선에서 야당이 사상 최대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야당이 사상 최다의 지지를 얻었던 8대국회에서 그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는 개인적인 영광을 안기도 했다.
암울한 유신시대
박정희 정권이 단행한 소위 ‘ 10월 유신’ 은, 선거법 개정으로 여당이 부정선거를 맘놓고 할 수 없게 되고 야당의 의석이 많아짐에 따라 의사진행에 있어 공화당이 사사건건 견제를 당하게 되자 군사정권이 궁여지책으로 국회를 해산한 데 따라, 이로부터 암울한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정치부재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해석 선생은 유신헌법하에서 치러진 9대 총선에서도 당선되어 국방위원회 간사로서, 한일친선협회 상임이사로서 활약하고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으나 긴급조치로 무장한 독재정권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극단적인 탄압으로 그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해석 선생은 78년의 10대 국회의원선거 에서 불출마 선언을 할 생각이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30여 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지만 유신의 허울을 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야당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하고, 야당은 적전분열을 계속할 뿐 정권을 인수할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후 입자를 물색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할 생각으로 지역구동지들에게 불출마 의사를표시하였다. 그러나 지역구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산진구를 대표하여 민주화투쟁을 할 사람은 해석 선생밖에 없다며, 정치를 계속할 것을 강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불출마 뜻을 일시 유보한 그에게는 엄청난시련이 기다리고있었다.
시련과 고통의 시절
정계에서 은퇴한 선생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불교의 발전을 위한 활동, 종친회의 족보발간사업에도 참여하고, 통일원 고문으로서 원로의 입장에서 남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시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0대국회를 해산한 신군부는 많은정치인들을 감금하였다. 해석 선생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 달 동안 불법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부정축재. 이미 30대 초반에 부산 최고의 부자로 ‘석탄왕’ 의 칭호를 듣던 그였다. 정치에 투신한 이래 한푼의 재산도 늘리지 않고 야당의 발전을 위해 그 많던 재산을 하나씩 둘씩 처분한 그에게 신군부는 부정축재 혐의를 씌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틀에 걸쳐 자택을 이잡듯이 뒤지고, 한 달 동안 그의 재산을 조사한 수사관들도 결국 부정축재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당 제일의 거부로 알려진 정해영 의원이 이렇게 검소하게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수사관이 진술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선생을 고문하여 재산의 대부분을 강제 헌납케 한 것이다.
해석 선생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재산환수를 않고 헌납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선생이 깨끗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생의 결백에 대해 중화민국 학술원은 82년 강제연금 상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해석 선생을 초청하여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함으로써 신군부에 대해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선생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불교의 발전을 위한 활동, 종친회의 족보발간사업에도 참여하고, 통일원 고문으로서 원로의 입장에서 남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고있다.
에필로그
2002년 현재,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군사독재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문민정부가 탄생하여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머지않은 민족통일을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이 못다 이룬꿈을 이루기 위해 장남 정재문의원이 지금 5선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야당의원으로서 정치에 뛰어든 정재문 의원은 부친의 뜻을 이어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으며, 특히 외교분야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보좌하여 소련과의 수교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남북긴장완화와 통일기반 조성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길러낸 동천학사출신의 영재들이 각계에서 국가발전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 최고의 부자로서 남부렵지 않은 생활을 팽개치고 평생 야당정치인으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온 해석 정해영 선생. 그가 뿌린 씨앗이 하나 둘씩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 현실을 과연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까?